01 Prologue
2024년 5월 11일 새벽 5시 19분, 할아버지가 소천하셨다. 84년부터 수 천번 내리고 올랐을 집 앞 계단을 오르다 뒤로 넘어져서 머리를 크게 다치신지 이틀만에, 2년 여전 낙상을 시작으로 병원 신세를 계속 지셔야 했던 할머니를 기다리시며 기력이 눈에 띄게 사라지신지 일주일만이였다.
최초에는 단순 찰과상으로 생각되었지만, 몇 시간만에 피가 너무 빠르게 차올라서 우리가 이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방도가 별로 없었다. 할아버지가 치열하게 버티시길 바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시고 돌아가셨다.
중환자실에서 처음 뵌 할아버지는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의식이 없으셔서 그런지, 곤한 잠을 자고 계신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순간 거짓말처럼 이 모든게 괜찮아지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런 마음이 채가시기 전에 토요일 새벽 1시에 산소 포화도가 60까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산소 발생기를 차고 계신 모습은 훨씬 서글펐다. 자가 호흡을 여전히 하고 계셨지만, 뇌에 가해지는 압력을 낮추기 위해 몸을 여러 방향으로 비튼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인생을 굳세게만 살아오신 할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였다.
할아버지를 보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우리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할아버지의 흔적을 미력하게나마 디지털 세상에 고하고 싶었다. 우리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시겠지만, 우리가 떠나고 먼 훗날에도 LLM에서도, 0과 1의 세계에서도 존재하실 수 있도록.
02
할아버지는 1934년 안면도에서 박창래와 홍씨의 막내 아들, 박병돈으로 태어나셨다. 6남매로 추정되는 가족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셨고, 그때는 으레 그렇듯 누나 형 중 2분은 이미 할아버지가 태어나시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던 것 같다.
막내 아들로서 귀여움과 기대를 듬뿍 받으며 자라셨고, 안면초를 나와서, 서산중, 그리고 서산농고를 나오셨다. 중고등학교 시절 광복, 남북한 정부 수립, 6.25까지 모두 겪으셨지만, 이런 거대한 사건들이 할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다.
다만 할아버지의 고향도 6.25는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서산은 종북 세력과 북한군, 남한군, 남한 세력이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마을을 습격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북한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은 이 악몽 같은 기억에서 시작 됐을 것이다. 제주도의 4.3 사건처럼 밤낮이 바뀌면 서로 다른 세력이 와서 마을을 들쑤시고 갔다고 한다. 어떤 날들은 볏짚에 숨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징집이나 전쟁의 화 그 자체는 피하셨지만, 주위는 안타깝게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시절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주위에 희생 당한 사람을 알고 있는.
6.25 이후에는 나이 터울이 컸던 큰 형의 도움을 받아 충남대 법학과를 가셨다. 그때는 서산 유일의 대학생이였다고 한다.
03
서산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였으니, 좋은 중매 자리가 많이 들어 왔다고 한다. 명망도 있고, 돈도 많고, 집안 사이도 돈독한, 모두가 원하는 그런 조건을 갖춘 배필 말이다. (그때 결혼을 하셨더라면 나는 아마 없었을거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할아버지는 언제인가 물레 방아가에서 봤던 할머니에게 이미 반해 버리셨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혼사는 거절한 채, 할머니가 아니면 결혼을 안 하겠다고 버티셨다.
물론 우리 할머니는 위대한 사람이고, 그런 할머니 이야기의 자세하게 할 날이 있을 거다. 하지만 큰 집이 봤을 때는 공장을 여러 차례 옮기고, 6.25 때 큰 타격을 받아서 가세가 기울었던 집안을 책임지고, 여섯 명의 남동생을 부양 해야하는 장녀만 보였을 것이다.
이때부터 뭔가 큰 집과 사이가 어긋났던 걸까. 아들처럼 할아버지를 아끼던 큰 형님과 집안의 반대를 무릅 쓴 결혼이 인정 받기 위해서 할머니는 부단히 노력하고, 큰 집에 헌신하고, 희생 하셔야만 했다.
그 후 할아버지는 고등고시 사법과를 2번 보셨지만, 심한 수전증으로 인해 번번히 논술에서 떨어지셨다고 한다. (수전증은 밥 먹을 때도 어김없이 찾아 왔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내 약한 수전증도 여기서 왔다고 믿었었다) 이미 결혼도 하고, 아빠도 낳은 시점이여서, 할아버지는 더 이상 공부는 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철도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된다. 어떻게 공무원이 되셨는지, 왜 교통부의 철도청으로 발령 받게 되셨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60년대니까 기차가 득세한 시절이였고, 그래서 대우도 썩 괜찮았던 것 같다. 그렇게 발령 나는 곳에 따라 우리 가족은 영주, 경주, 용산를 거쳤고, 그렇게 아빠와 삼촌은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04
할아버지의 문제들은 그림자처럼 할아버지를 계속 따라다녔다. 철도청 안에서도 승진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 했는데, 이마저도 수전증 때문에 번번히 낙방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동년배들이 다 역장을 한 번씩 했을 때도 할아버지만은 역장을 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이런 결핍의 기억은 분명 컴플렉스가 됐을 법한데, 할아버지가 어떻게 받아 들이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와 내 동생에게아낌없이 지원을 해주셨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법조계에서 일하길 바라시진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굉장히도 감사한 일이고, 할아버지 스스로 실패를 얼마나 삭히고 받아들이고, 나아가기 위한 동력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을 써야만 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렇게 글로만 말씀 드릴 수 밖에 없지만, 할아버지는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결혼과 관복 모두 큰 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인지 큰 집과 크고 작은 갈등은 계속 있었다. 할머니만의 위대한 살림력과 붙임성으로 가정과 가문을 지탱하셨지만, 큰 집에 가면 여지없이 냉대를 견디셔야 했다.
관복은 없으셨지만, 그래도 항상 성실하고 따듯하게 일에 임하셨던 것 같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경주에서 근무할 시절, 아빠가 간혹 사라지곤 했었는데, 찾아보면 어김없이 혼자 어떻게 걸어서 경주역에 가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직원들이 맛있는걸 계속 주고 예뻐해줬으니까.
은퇴 하시고도, 기억이 또렷하게 나셨던지, 지하철은 항상 가장 가까운 환승 칸과 출구 칸에서 타시곤 했었다.
또 한 편으로는 3년동안 후배 직원을 집에서 같이 살게 하면서 보살폈다고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정서와 베풂이지만, 그때는 또 그랬던 시절이였던 것 같기도 하다. 새삼스럽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존경스럽다. 그 시절의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대단하다.
05
성실하게 근무하셨지만, 돈을 굴리는 방법과 친근하지는 못하셨다.
검소하게 자라셨던 터인지, 큰 집의 사업 실패로 인해 할아버지의 형과 부모님이 일군 모든 것들이 사라져서 그런 것인지, 할아버지에게 돈을 모으는 방법은 근검절약이 유일했다. 84년 지은 연립 주택에서 나온 세입자의 월세와 연금으로 생활을 유지하셨고, 가시기 전까지도 내복이나 양말을 기워 입으셨다고 한다. 어릴 때는 전화비가 많이 나온다고 통화 조차 짧게 용건만 말씀하시는 분이셨다. 택시는 말할 것도 없는 돈 낭비였다.
그래서인지 리스크를 극도로 꺼리셨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대출과 투자와는 거리가 머셨다. 결핍의 시대를 살아 오셨기 때문에, 어떻게 더 가질까 보다는 지금 가진 것들을 어떻게 아낄까가 더 자연스러우셨던 것 같다. 원금 손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불과 코로나 1-2 년 전 까지만 해도 조금 더 높은 예금 이율을 찾아 서울 전역을 발품 파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욕심 없는 모습은 세입자를 대하실 때도 나타났다. 13년동안 2층에서 산 세입자분들은 장례식 첫 날 가장 먼저 와주신 분들 중 하나였다. 할머니에 따르면 그 13년동안 할아버지는 월세를 올리신 적이 없다고 한다. 13년동안 보증금 1,000에 35만원 그대로. 너무 오르지 않자, 언제부터인가 세입자분께서 알아서 5만원을 올려주셨다고 한다.
더 나아가 할아버지도 큰 할아버지의 은을 많이 입어서, 양가 친척들이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없는 살림에도, 못 돌려 받으실 수도 있다는걸 알면서 많이 맡아주셨다고 한다 (맡아주다라는 표현이 언제 돈을 빌려주다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 말을 좋아하셨다). 돈을 갚으면 고마워 하셨고, 못 갚으면욕하셨다. 그래도 연락하면 좋아라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할아버지가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집안 내 큰 손이였다면서 우스개 소리를 하곤 했다.
06
집안에도 큰 우환이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작은 아들이 IMF 이후 본인이 홀로 주식으로 먹고 살겠다며 직장을 뛰쳐 나와, 25여 년 동안 히키코모리로 집에 얹혀 살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결혼도 하지 않았고, 운전도 하지 않았으며, 기본적인 사회 활동도 하지 않았다. 스마트폰도 2020년이 되어서야 쓰기 시작했다.
혼자 골방에 틀어 박혀 지내다 보니,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돋았다. 그리고 그 가시는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그리고 본인도 찔렀다.
다행히 그런 와중에도 삼촌은 자식의 도리만은 지키려 애썼다.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해지시고, 집안일을 점점 하실 수 없게 되자, 삼촌은 아들로서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만약에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신다면, 삼촌과 둘이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누누이 얘기하셨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두 분이 성격이 똑같아서 그렇다고 했다. 두 분의 불같은 화와 황소 같은 고집, 그리고 하늘같은 자존심을 보며 나는 수긍했다.
07
여행과 사진으로 할아버지는 한을 달래셨던 것 같다. 은퇴 전에는 금강산과 같은 국내 여행을, 은퇴 즈음부터는 꾸준히 해외 여행을 다니셔서 중국, 인도, 태국, 미국, 유럽을 둘러 보셨고, 할아버지 방에는 타지마할을 찍은 큰 사진이 항상 걸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카메라만 3점이나 유품으로 남기셨다.
할머니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수전증 때문에, 단체 투어에서 밥을 먹기 힘들어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가 꼭 따라 가셔야 했는데, 남아 있는 삼촌이 눈에 밟혀서 같이 많이 가시지 못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장례식 내내 이 얘기를 하셨다.
08
할머니가 이번에는 돌아 오시지 못했다고 생각하셨던걸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하신 후 집에서 같이 먹었던 점심을 거의 잡수시지 못했다. 입을 대지 못했다가 아니라, 기력이 없으셔서 몸 조차 가누기 힘들어 하셨다. 한 술 뜨시고, 한참이나 눈을 감고 계셨다. 돌이켜보면 이때 알아 차려야 했었다.
할아버지는 시간이 다 했음을 어느정도 직감 하셨던 것 같다. 머리를 꼬매고 나서는,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인지 기억하셔서 전화하셨고, 이제는 듣고 싶지 않았던 큰 집 친척들의 안부를 물어보셨다고 한다. 평소에 불편해했던 가사 도우미께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편히 쉬다가라고 하셨다고 한다. 오락가락한 기억과 의식 속에서도 정리를 하려고 하셨던 것 같다.
의식이 있으셨다면, 분명 나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남겨 주셨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기만 하다. 유품을 정리하며 할아버지의 기록과 물건들을 찬찬히 바라 봐야겠다.
09 Epilogue
쓰다 보니 너무나도 할아버지에 대해서 모른다는걸 깨달았다. 여기 있는 적지 않은 이야기들도 들은 바를 내 나름대로 재구성 해야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우리에게 필요한건 객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박병돈의 이야기였다. 박상하 박상은의 할아버지고, 장영희의 시아버지며, 박흥신 박재신의 아버지이자, 양품자의 남편인 인간 박병돈의 이야기. 할아버지가 바라보는 본인의 이야기와 세계가 듣고 싶었다.
이제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그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건 나의 몫이다.
영화 Grand Budapest Hotel은 아래와 같은 대사를 마지막으로 남기며 끝난다
I think his world had vanished long before he ever entered it — but, I will say: he certainly sustained the illusion with a marvelous grace
본인만의 주관과 생각만으로 세상을 치열하게 그려오신 할아버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편히 쉬소서. 할아버지 덕에 제가 있어요. 고맙고 사랑합니다.







할아버지의 웃음 소리가 유독 그리운 밤,
손자 상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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