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이 좋게도 회사에서 작년 2월부터 LLM 기반 챗봇 프로젝트를 리딩했었다. “챗봇을 만든다”라는 나름 자명한 결론부터가 아니라 센드버드는 LLM을 어떻게 제품화 해야하나의 근본적인 고민부터 시작했으니 실제로는 더 짧은 여정이었다. 그렇게 약 10개월이 지난 지금, 센드버드 챗봇은 많진 않지만, 고객을 거느린 어엿한 MVP가 되었다. 가야할 길이 아직은 아득하고 험난하기만 하지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여러 소회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유의미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실험을 빠르게 해야한다
데이터도 없고, 고객도 없는 시점에서 할 수 있는건 아이디어를 빠르게 실험해보고 검증하는 것이다. 굳이 제품화해서 검증할 필요는 없지만, 고객이 실제로 써보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검증은 2% 부족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기능이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 기능을 만들어보고 시장에서 피드백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피드백을 빠르게 받을수록 좋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빠르게 실험을 돌릴 수 있는 근육이 필요하다. 몸은 기억한다고 하지 않나. 체화된 기계적인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육체적인 근육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가설을 세우고, 제품화 해보고, 피드백을 받고, 그 피드백을 바탕으로 다시 싸이클을 도는 과정을 체화해야한다. 우리는 회사로서 이런 접근법을 취해본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접근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이것이 괜찮은 방법이라는 것에 공감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썼던 것 같다. 여전히 서툰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들지만, 그래도 센드버드라는 성숙한 회사에서 새로운 스타트업에 버금갈만 한 시도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2. 그러나 그런 실험 중에서도 관성은 자라난다
고객에게 꼭 필요한 핵심적인 기능을 만들었다. 잘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주어진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어떤 대단하고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 여러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시간과 리소스 안에서 노력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 기능을 향상 시켜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고객이 사용하고 동작하기 때문에 바꾸는 것을 최초의 잣대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훨씬 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게 되고, 우선순위를 살펴보게 된다. 왜 해야 하는지 메트릭을 먼저 찾게 된다. 그렇다! 벌써부터 관성이 생기게 된다. 관성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객이 쓰고 있으니 당연히 신중하게 접근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건 초기 제품의 아주 사소한 기능이라도, 고객에게 쉬핑되서 고객이 그럭저럭 쓰고 있다면 고객의 경험이라는 관성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라는거다. 그렇기 때문에 빠르게 제품을 만들어 나가야 하면서도 신중해야하고, 관성을 넘어야만 한다면 과감한 결정과 그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향상은 시켜야 한다는 믿음은 있었는데 정량적 근거를 찾지 못해서, 의견의 합의를 보지 못해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기능들이 있었다. 2024년에는 이런 기능들을 조금은 더 잘 챙기고 싶다.
3. 요원한 PMF
센드버드 내에서는 많은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있고, 그런 제품들의 OKR은 Product Market Fit (이하 PMF)를 달성하고, 달성이라고 볼만한 여러 지표들을 트랙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지표를 달성해야, PMF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객이 X명일때? 고객의 변화량이 Y%일때? 매출이 $Z일때? 세일즈 없이 인바운드로 고객이 알아서 올때? 그럼 알아서 온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이 질문들이 2023년 내내 꼬리를 물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PMF를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는 이유는 제품에 대한 확신과 폭발적인 성장은 물론이고, 그에 맞춰 세일즈, 마케팅, 고객 지원, 채용과 같은 기능들이 이제는 스케일 되야 하기 때문이다.
애석하지만 나는 제품을 만드면서 달성해본 적이 없고, 센드버드 챗봇에게도 시간은 조금 더 필요해 보인다. 그럼 상상 속의 유니콘 같은 PMF에 도달 했는지 도대체 어떻게 판단 할거냐고 되물을지 모른다. 비겁하지만 어떤 판사가 얘기했던것 처럼 그 상황이 되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달성의 여부를 따지기 위한 힘과 시간을 최소화해서, 오히려 제품을 만들고, 고객의 피드백을 받는데 써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결국 2024년에는 PMF라는 마법같은 변곡점을 마주해야만 나도 챗봇 프로젝트가 성공했다고, 내가 잘 했구나, 성장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4. “고객은 플랫폼을 사지 않는다. 솔루션만 살 뿐”
우리는 플랫폼을 만들고 있고, 당연히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겪어보니 고객은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더 나아가 실제로는 “Unknown unknowns”라는 개념처럼 고객은 AI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추상적인 무엇을 원한다는 사실만 알 뿐이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그것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져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플랫폼을 만들더라도, 플랫폼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어떤 솔루션을 만들고 쓸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우리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작년에는 우리 제품과 API, 문서를 보고 고객 스스로 “솔루션” 상상하고 완성까지 해야했다. 그리고 애석하지만 소수의 고객만 그런 역량과 리소스, 그리고 그 리소르를 투자해야 한다는 정리된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플랫폼이지만, 버티컬에 집중된 솔루션을 만들어야 한다. 플랫폼을 고치라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을 이용해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줘야 한다.
5. Scaling out as a person
초기 제품의 PM으로 여러가지 역할을 동시에 했었다. 고객 콜도 들어가고, 가격 정책도 정하고, 제품도 만들고, 데모도 제작하고, 외부 행사에서 발표를 하기도 했었다. 그렇다 보니, 번 아웃 되지 않는 동시에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잘해야 했다. 많은 것들을 하기 위해 기록의 시간도 아꼈다. 말로, 슬랙으로 많은 것들을 빠르게 결정했었다. 더 나아가 내가 생각하는 그림과 비전도 그때 그때 구두로 공유 했던 것 같다. 결국 내 시간이 내 스케일을 결정했었다.
여러 분들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3분기부터는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개선하고 문서화 하고 기록을 더 많이 하려고 했었다. 더 많이 써서, 더 많은 분들에게 공유하고, 더 빨리 공유하려고 했었다. 그렇게 해서 내 문서들이 내 스케일을 비약적으로 늘려주길 바랬다. 하지만 글의 내용이나 정리 때문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생각보다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많은 분들이 읽지 않으셨고, 읽더라도 내가 뜻한 바를 글에서 읽어내지 못하셨다. 또 문서들이 너무 많아지기도 했다. 우리 회사가 200명이 넘는 나름 큰 회사라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래서 2024년에는 글이라는 수단은 유지한 채 나를 스케일 할 수 있는 더 다양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볼 계획이다. 결국 제품과 함께 나도 성장해야한다.
6. 최고의 함정
우리 회사에서 많이 했던 생각 중 하나는 “Build minimum set of features that will unlock demand”나 “What will get us to the fastest ARR”와 같이 효율성의 시선으로 문제를 접근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날카로운 질문인 것 같으나, 곱씹어보면 비현실적이다. 우리는 아직 최고를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런 질문을 통해서 높은 목표를 세우고, 여러 전략들을 세우며, 가설들을 만들어 검증해 보는 것은 좋다. 하지만 어떤 것이 최고인지를 증명하고 합의하기 위해 내부적인 갑록을박을 펼쳐야 한다면 합의에 다다르지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할 확률이 높은 것 같다.
항상 부족한 데이터로 결정을 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최고를 노리되, 만들기 전에 정의하고 알 수 있다는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PM으로서 리소스를 낭비한다는 것을 굉장히 경계 했었는데, 오히려 리소스 낭비를 고민해서 결정을 한순간 한순간 지체하는 것이 지금 스테이지에서는 더 큰 리스크가 될 수 도 있다는 걸 깨달았던 한 해인 것 같다. 오히려 반대로 “낭비”를 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만들어 보고, 그 대신 성실하고 꼼꼼하게 체크하고 피드백 받아, 정직하게 그 피드백을 바탕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0 → 1은 나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것 같다. LLM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타고 우리의 조각배도 떠오를 수 있었다. 올해는 1 → 10으로, 마냥 떠다니기 보다는 이젠 성과와 방향을 가지고 항해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성공적인 한 해로 또 내년에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허상이 될 수 있는 질문들은 경계하며, 기본에 충실해서, 제품보다 더 빨리 성장하는 PM이 될 수 있길 기대하며 회고를 마친다.
작년에 적어 두었던 쿄세라 창업주의 이나리모 가즈오의 말로 마지막을 대신한다.
순수한 사람은 두려움 없이 발을 들여놓고 매우 쉽게 승리를 거머쥐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순수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에너지를 더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나모리 가즈오, 왜 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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