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요즘 들어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는 도무지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단순히 같은 의미로서의 말이 아니라, 상위 개념의 같은 언어로서의 “말”말이다. 서로의 살아온 삶에 따라서, 서로의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서 모든 말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정의란 말로 싸우고, 인권이란 말에 대해 싸우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좋은지 나쁜지에 평행선을 그리며 다툰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같은 자모음을 쓸 뿐이지 전혀 다른 언어를 하는 것과 별반 다를게 없다. 아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도 생각할테니 오히려 더 나쁜 셈이다.

어떤 한 단어의 정의를 놓고 싸운다면 그건 지금 세상에서는 실로 격조 높은 대화다. 우리가 하는 말들의 대부분은 정의는 차치하고, 정의를 하기 위한 아주 기본적인 낱말조차 의미를 서로 달리 해서 정의라는 시작점에 가기 전에 이미 탈선되기 일쑤다.

창세기에서는, 먼 옛날, 한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던 인간들이 하늘을 닿고자 바벨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야훼께서 땅에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 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11장 4~9절 (공동번역)

우리는 흔히들 사람들이 오만해졌기 때문에 신이 바벨탑을 무너 뜨렸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도 성경에는 그런 뉘앙스로 설명되고 있다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아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단순히 탑을 무너 뜨렸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섞어 놓았다는 것이다. 다시 보자. 사실 바벨탑 그 자체를 무너 뜨렸다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다. 고로 야훼 (하나님)가 한 것은 지금 짓고 있는 바벨탑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바벨탑의 원천 봉쇄 할 수 있도록 사람들 사이의 말을 섞는 것이였다. 그리고 (성경상) 그 후손들인 우리는 이제는 아주 대화를 못할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한 의미인 오만이 있다.

이제는 오히려 더 각자의 언어로만 얘기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오만해지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의 우주 안에서, 스스로의 단어를 정의하고,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과 그 단어를 공유하는 작은 버블 안에서만 그 단어를 쓰기에 우리의 언어는 더 파편화 되고 있다. 그 작은 버블 안에서 우리는 온전히 스스로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우리만의 세계로 더욱 침전하게 된다. 그것이 오늘날의 진정한 의미의 오만 아닐까.

이념의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미국 정치.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출처: Wait But Why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 우리가 적어도 유지하려고 해야되는 것은 적국 간의 핫라인처럼, 똑같은 언어이다. 단순히 같은 자모음을 공유하는 것을 너머 중요한 개념들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그래야 말이 정말 통할테니까.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쓸 때 서로를 이해하고 나아갈 수 있다. 서로를 이해해야만 “오만하다고” 여겨졌던 해결책을 통해 모두의 협력이 필요한 문제들을 풀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은 자본도 시간도 아니다. 같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협동심이다.

내가 생각하는 오만은 “하늘을 닿으려고” 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그 먼 옛날 인간의 자기 밖에 모르는 본성으로 돌아갈 때 나온다. 동물적 본성에만 충실한 것이다. 그러니 하늘을 닮고자, 하늘을 닿고자 하는 행위는 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나아가는 것이니, 실로 이 오만은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시 우리만의 바벨탑을 지어야 하지 않을까? 바벨탑이 먼저인지, 바벨탑을 짓기 위한 합의가 먼저인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지금도 기후 변화와 같은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 저마다 조그만 바벨탑을 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조그만 노력들이 모여 하늘을 닿으려면 우리는 같은 언어를 할 필요가 있다. 서로를 이해해서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1960년대 우드스탁 이전 미국에서는 우주라는 바벨탑이 있었다. 냉전의 부산물이였지만 그때 당시 우주는 모든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미지의 세계였다고 한다. 쉬워서가 아닌 어려워서, 가봐서가 아닌 가보지 못해서, 잘 알아서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해서 사람들을 설레게 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때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풀고 싶은 바벨탑을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후 변화와 같은 전지구적 오만과 협동이 필요한 풀어야만 바벨탑이 있다.

성경과 달리 우리는 바벨탑을 짓지 못해서 하늘을 닮지 못하면 또 다시 영원히 흩어져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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